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리 S. 트루먼 (문단 편집) === 대통령 제1임기(1945.4.~1949.1.) === [[파일:President_Harry_S._Truman_taking_the_oath_of_office,_7-09_p.m.jpg|width=500]] >…(전략) 한 때 무능하고 유약하다 폄하되었던 평화의 연합체는, [[아돌프 히틀러|독]][[베니토 무솔리니|재]][[도조 히데키|자]]와 군부의 폭정보다 훨씬 더 강력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ㅡ 1945년 5월 8일 유럽전선 승리를 발표하며.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해야 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고를 받고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했다. 이 때문에 트루먼을 비판하는 표현으로 'give 'em hell, harry(엿 먹여줘, 해리)'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1975년에는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다. 그런데 트루먼은 사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취임 이후에 처음 보고받았다. 원래 부통령으로써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해야 했지만, 루스벨트 생전에는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트루먼의 프로젝트 접근을 의도적으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종전 후에는 [[사회주의]] 권역의 확산 저지 문제와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서유럽 경제의 복구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트루먼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여 공산화 방지를 천명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렵 대륙에 경제 원조를 하는 [[마셜 플랜]]을 세워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부흥을 지원했다. [[이스라엘]]의 건국에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마셜 플랜 등에 대한 당시 대중들의 여론이 곱지만은 않아서 [[1948년]] 재선에서 트루먼의 재선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1944년]] 이미 FDR과의 대결에서 상당한 득표력을 보인 [[미국 공화당]]의 [[토마스 E. 듀이]] 후보가 다시 대선 레이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여권이 둘도 아닌 셋으로 찢어졌다. 전 부통령이었던 월리스는 진보당을 차려 출마했고, 특히 [[남북전쟁]] 이래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남부는 주권민주당(딕시크랫)이란 이름으로 따로 출마해 실제 4개 주에서 승리해 39명의 선거인단[* [[앨라배마]],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 그 외 [[테네시]]에서 [[불충실한 선거인단]] 1명이 나왔다,]을 확보하는 이변을 일으키게 된다. 이는 FDR 시기까진 그래도 뉴딜 동맹에 붙어있던 남부 보수파들이, 트루먼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한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인종적 민권운동]]에 반감을 가진게 컸다.[* 사실 FDR 시기도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등이 이쪽으로 유명세를 떨치긴 했지만, 뉴딜 시기 민권운동은 노동 분야가 더 돋보였다.] 실제 트루먼 대통령은 민권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1945년 "우리는 새로운 세계, 훨씬 나은 세계, 즉 인간의 영원한 존엄성이 존중되는 세계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발언하며, 비록 사회적인 평등은 아닐지라도 정치적인 평등은 신봉했으며, 흑인 도시로의 점증하는 중요성을 인정했다. 남부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린치와 기타 형태의 민중의 힘이 1946년에 알려지게 되자, 그는 인종 및 종교에 입각한 흑백 차별대우를 조사하기 위한 민권위원회 위원들을 임명했다. 그 이듬해에 발표된 보고서는 미국 생활에 있어서의 흑인들의 2급 지위를 상세히 기록했다. 보고서는 모든 미국민들에게 보장되어 있는 권리를 연방 정부가 국민들에게 확보해주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0개항 민권계획을 의회에 송부함으로써 이에 응답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보다 강력한 민권옹호 자세에 성난 남부 민주당원들이 1948년 민주당을 떠났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연방 정부 고용분야에서 흑백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고, 군대 내에서의 평등한 대우를 명령하고, 그리고 군대 내의 흑백 인종차별을 끝내는 방향의 일을 하기 위한 위원회 위원들을 임명했다. 군대 내에서의 (흑인에 대한) 마지막 제한은 한국전쟁 중에 끝났다. [[http://www.americanhistory.or.kr/book/files/eleven07.html|민권 운동의 기원]]. 다시 선거 얘기로 돌아와서, 16년 만의 정권교체 가능성을 벼르던 공화당은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다며 그야말로 약이 바짝 오른 상황. 실제 트루먼은 이런 엄청나게 불리한 판세를 어떻게든 해결해보기 위해 당시 전쟁영웅으로 인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아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고 했었으나 아이젠하워가 '군인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이유로 거절하면서 실패했고[* 사실 저 때 공화당 역시 아이젠하워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 시도했었다. 정치 성향과는 상관없이 저 당시에는 아직 아이젠하워가 정계 진출 의지가 없었다는 이야기.], 대통령 선거날 자신의 패배를 예상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아침에 일어나자 박빙의 차로 자신이 이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당초 공화당의 기대와 달리 결과는 반대였고, 이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대선 당시 라이벌이던 듀이가 낮아보이던 트루먼의 지지율과 자신의 인기를 과신해 미리 각료를 구성하고 뱃놀이나 즐기는 등 선거 유세 기간을 흥청망청 보낸 게 컸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 선거 2주 전인 10월 중순 시행된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듀이는 5% 이상으로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2주일 사이에 표심이 뒤바뀌어버린 것. 물론 후대 연구자들은 듀이가 우세했다는 내용을 담은 당시 <갤럽>의 여론조사 자체가 오류가 많은 조사였다고 보기도 한다. 전후 미국은 농촌보다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는데, 표본에서 농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그 결과 듀이의 지지율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갤럽 외에도 수많은 언론들과 여론조사들이 듀이의 승리를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대놓고 한 잡지는 듀이에게 '차기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쓰기까지 했고, 유명 정치평론가들은 듀이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차기 듀이 내각의 장관은 누가 될까를 예측하고 있었으며 대선 승자를 예측하는 도박에서는 트루먼 승리 진영의 배당률이 15배까지 올라갔던 상태였다. 이는 개표방송 초반까지도 이어져 초반 트루먼이 앞서가자, 초반이라 트루먼 강세지역의 개표가 먼저 되어서 그럴 뿐이고 개표가 진행되면 듀이가 역전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여하간 [[1936년]] 루스벨트 당선을 예측하며 현대적 여론조사의 효시가 된 <갤럽>은 12년 만에 이 사건으로 체면을 구긴다.[* 여론조사와 별도로 선거인단 제도에서도 트루먼은 우세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언론은 듀이의 승리를 예측했다. 트루먼은 전국적으로는 듀이보다 4.5%를 더 득표했지만, 78석이 걸린 [[오하이오]], [[일리노이]], [[캘리포니아]]에서 1%도 안되는 격차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는 월리스가 유독 4.7%를 득표한 상황이었다. 이 세 주의 격차였던 2만 9천표만 뒤바뀌었어도 대선은 전혀 다른 결과로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갤럽>이 행한 잘못된 여론 지지율 조사방식은 이후 통계학개론 강의 등에서 적절한 표본집단 선정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사례로 두고두고 인용된다. [[파일:external/blogs4brownback.files.wordpress.com/dewey-defeats-truman.jpg]] 대통령 당선 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의 오보를 들고 웃는 트루먼. 하지만 당시 선거에서 언론에 [[하이라이트]]로 잡힌 장면은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이라는 [[신문]]이 앞서서 '듀이가 트루먼을 이겼다'고 [[설레발]]을 친 게 하루아침에 오보가 되어버린 사건이었다. 원래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은 공화당에 우호적이었고 트루먼과 민주당에게 적대적인 신문이었기 때문에 민주당 후보인 트루먼의 패배를 아예 기정사실화하고 헤드라인을 저렇게 박아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당선된 이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을 비웃듯이 저런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이 일화는 신문 보도의 정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유명한 이야기로 손꼽히며, 그와 함께 트루먼이 신문을 번쩍 치켜들고 웃고 있는 위 사진도 미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 중 하나로 뽑힌다. 어쨌든 이런 역전극을 통해 트루먼은 대통령에 재선될 수 있었다.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64609|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이야기]]. 그로부터 59년 뒤인 2007년, 시카고 트리뷴은 망하지 않고 자신들의 실수를 덤덤하게 회고했다. [[https://www.chicagotribune.com/nation-world/chi-chicagodays-deweydefeats-story-story.html|#]] 사실 당시 시카고 트리뷴만 이런 실수를 했던 건 아니고, [[라이프]]지를 비롯한 여러 언론도 듀이를 '차기 대통령'이라고 표기한 사진 등을 내놓았지만 상기한 사진의 임팩트가 워낙 세다 보니 시카고 트리뷴만 더 부각된 측면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